이중섭은 대단한 부자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이어온 지주 집안이었다. 이중섭은 평북 정주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6년 일본으로 미술 공부를
하러 떠났다. 국제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했는데
공부하는 환경이 좋지않아 일년도 안되어 그만두고
문화학원에 재입학하였다. 공부를마치고 귀국하여
한국에서 미술활동을 했다. 이중섭은 1945년 일본인
마사코와 원산에서 전통혼례를 치렀다. 이중섭의 생활
수입이 시통치 않아 아내인 남덕(한국이름으로 개명)이
재봉질을 하여 살아갔다. 이중섭은 미술의 기법을 '한구의것'
을찾고싶어 했다. 1952년 한국전이 한창일때 이남덕은 부친의
부음을 듣고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동안 이중섭은 홀로 미술활동을 하다 1956년 9월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마흔살에 생을 마쳤다.
아내인 이남덕은 한일 국교가 정상화 된 후에 서울을
찾았다. 이중섭의 수많은 작품이 남아 있는 것도 아내 이남덕의
공이 크다.
이중섭이 암탉과 수탉 한쌍을 통해 부부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해석되는 '부부'(1953년)
복숭아를 따서 아내에게 주는 장면을 그린 은지화(1954)
이중섭의 대표작 '흰소'(1950년대) 일필휘지의 붓질이 인상적이다.
이중섭이 생별한 가족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바람을 담아
그린 '길 떠나는 가족'(1954)
연애시절 아내의 다친 발을 치료해 준 실제 일화를 그린 엽서화(194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