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향은 우연히 함흥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잃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 같았다. 나중에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 에 발표한 ‘바다’ 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스물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 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 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하고 웃었다 ..."
-자야의 글 중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초례만 치른후 도망쳐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오곤 했다. 백석은 기생과의 동거를 한사코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자야는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 했다. 백석이 태어난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 文壇史的으로 대가들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백석은 반세기 가까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었다. 시집도 <사슴> 한 권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이토록 수많은 시인들과 문학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그의 노력과 시를 읽을때마다 묻어나오는 솔직함과 서민적(방언)이고도 아주 서정적인 시를 白石만의 언어로 쓴 이유가 크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조만식선생의 사랑을 받아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다.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 작가였다. 고당 조만식선생의 비서로 그는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을 번역하며 북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운명의 만남 자야는 집안이 사기를 당해 파산한 후 열여섯 나이에 기생이 된다.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자야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서 스승을 면회하기 위해 함흥으로 간다.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하나 면회가 불가능해지자 아예 함흥에 눌러앉았고, 다시 함흥의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생이 되면 법조계 유력인사들과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스승의 면회가 보다 쉬워 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스승과의 면회를 위해 기생의 길을 선택했던 일만보아도 그는 대단히 의리가 깊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스승과의 면회는 끝까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김영한은 이곳 함흥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함흥에서 영어교사로 있던 시인 백석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함흥 영생여고보의 회식자리에서의 처음 이뤄진 두 사람의 만남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진향에게 첫눈에 반한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다고 한다. 당시 진향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의 나이는 스물여섯.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 중 먼저 서울로 올라온사람이 진향이고, 결국 백석도 함흥의 교사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김영한의 자취방에서 뜨거운 사랑을 이어나간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보금자리를 튼 두 사람은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 엄연한 부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김영한과 백석의 꿈같은 사랑의 동거는 3년만에 위기를 맞았다.하늘도 말리지 못할 것 같았던 이들의 불같은 사랑도 결국 백석의 부모에 의해 엇갈림이 시작이 된 것이다.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한 백석의 부모는 백석을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인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내려가지만, 혼인을 치루고 도망쳐 다시 김영한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함께 만주로 도피하자고 재촉하지만 김영한의 반대로 결국 백석 홀로 만주로 떠나게 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자신이 싫어 만주로의 사랑의 도피를 포기한 이가 김영한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백석과의 영원한이별이 될 줄이야. 해방이 되고 다시 한국전쟁이 일어나 백석은 북한에서 재북작가로, 교수로 남고 김영한은 남한의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란 요정을 차리고 이곳을 세를 놓아 많은 돈을 모으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재산 중에 현금 2억원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그리고 대원각의 모든 전각과 땅은 법정스님께 시주를 하게 된다.
대원각은 당시 3공화국 시절 요정정치의 산실이었다 평소 무소유의 삶을 사시는 법정스님은 길상화 김영한 보살의 뜻을 수차례 거부하다가, 나중에 그 뜻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길상사를 창건되게 된다. 당시 전 재산을 보시한 길상화 보살에게 어느 기자가, ‘시가 천억 원의 엄청난 재산을 이렇게 내놓으시는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 고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길상화 보살의 대답은 이랬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김영한 보살의 백석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알만한 대목이다. 국악계에서는 길상화나 김영한보다는 김진향으로 더 널리 알려진 그녀. 그리고 그녀의 일생과 사랑이 고스란히 드리워진 사찰 길상사. 길상화 보살의 감동적인 순애보를 가슴에 안고 돌아보자면 길상사 경내 한 켠에서 법정 스님의 반가운 법문 하나를 만난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남자건 여자건 누구나 평생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사는 연인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는 점이겠지만... 그래서 가슴에 묻는 것 아니겠는가. 그 연인이란 영화 속의 아름다운 여배우이거나 문학작품 속의 구원의 여인 등이 대부분이겠으나, 간혹 현실에서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정인(情人)일 경우 그것은 일생을 두고 아릿한 아픔이 된다. 물론 이러한 아픔은 어떤 측면에서는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
'추억이 많은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 라는 말도 있잖은가. 롯데 그룹의 회장인 신격호 씨는 어린 시절 읽었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 나오는 유부녀 '롯데' 를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다가 창업시 자신의 기업 이름으로 썼고, 피카소는 자신의 연인들을 곧잘 그의 화폭에 담았다. 문인의경우는 이러한 묻어두거나 숨겨온 사랑이 시나 소설을 통해 드러낸다.
여러군데 찾아 보았으나 진향의 미색에 관한 글은찾아 볼 수 없었고, 백석에 대하여는 미남이며 서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여러군데에서 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묵은 사진이라도 찾아 실었으니 여러분들은 미루어 가늠 하시기를 바란다.
내용이 애틋하여 모셔온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