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창작 실기론
-글쓰기의 6하 원칙
이 명 재
1. 실용적인 시론(試論)
문화의 세기라 일컫는 21세기는 문학 장르상의 선호 순위나 활용 가능성 면에서 모름지기 수필의 시대라 할 만하다. 흔히 말하듯 19세기 소설의 시대를 거쳐서 20세기 비평의 시대에1) 이은 금세기는 수필시대일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지난 세기의 후반 무렵부터 문학 장르별 통계에서도 수필의 선호도는 이미 드라마 등과 함께 시와 소설을 추월하여 일반 독자들의 제 1 순위를2) 차지해 오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 대학 입시에서 일종의 에세이 분야인 논술실기를 보듯 구미의 여러 나라 대학에서도 에세이 교육이나 수필 쓰기 훈련을 강화하고 있는 현상도 점차로 높아지는 수필장르의 긴요성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최근 시중의 주요 일간지 기자 등이 직접 취재한 구미 여러 나라의 글쓰기에 대한 현황조사 사실도 참고가 된다. 미국 하버드대학 우등생들 인터뷰 장면을 확인해 보면 서슴없이 그들의 제일 소원은 글 잘 쓰는 것(굿 라이팅)이라 한다. 그리고 중학 때부터 글쓰기 과제를 많이 풀어온 옥스퍼드 대학생들은 그들 대학을 말과 글로 평가되는 학교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의 그랑제꼴 예비반 학생들은 말과 글이 글로벌 경쟁이라며 주말마다 논술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2005년 7-8월, 9월 하순). 글은 미래에 길이 남는 기록물일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긴요한 현대인의 필수 요건인 것이다.
수필은 실제로 에세이 본래의 속성 면에서 내용과 형식 및 제재 등에서 자유롭고 생활적인 만인의 문학인 특장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일상의 글 가운데서 감상문, 서정문, 기행문, 논술문, 서간문, 일기문, 회고록, 문학평설,4) 신문사설, 칼럼(시사 단평), 신간 서평 또는 독후감, 당선소감, 심사소감 등으로 현대생활에 필요한 글들은 넓은 의미로 에세이 영역에 포함되는 점에서도 수필은 가장 유익하고 친근한 대상이다. 더구나 치열한 사회생활 중에 그 분량이나 관심사 및 읽기 면에서 부담 없이 접하여 친할 수 있는 수필이 현대인의 사랑을 받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 특히 인터넷으로 인해서 세계가 거의 동시간대로 열려있는 오늘날에는 시나 소설과는 달리 지구촌 곳곳에 이메일을 통한 수필의 왕래와 활용으로서 거듭난 에세이문학을 꽃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긴요한 생활인의 벗으로서 각광받는 수필을 보다 문학적으로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시 작법이나 소설 작법에서도 그렇지만 더욱이 수필 작법에는 왕도(王道)가 있을 수 없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보면 각종 교양 교재와 각 장르의 문창과 실기에 이르기까지 창작론은 어수선할 정도로 많으나 신통한 것은 찾기 어려울 뿐이다. 글쓰기나 문장 짓기 메커니즘이란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대상이나 필자 또는 개성과 환경에 따라서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강의 요령을 터득해서 활용하면 보다 효율적인 글쓰기로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으므로 그 주요사항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는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통해 여러 문인과 학자들이 언급한 문예수필의 요점들에다가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가미하고 간추려서 정리해 보는 수필 창작론이다.
2. 수필 잘 쓰기의 요점
일찍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였던 싱클레어 루이스4)는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특강하면서 말했다 한다. 수많은 청강자들 중에 문학 교양을 넘어서서 직접 문인으로 출세하려는 작가 지망생은 강의실보다는 곧 자기 집에 돌아가서 손수 소설을 써보는 작품습작을 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글쓰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문학이론이나 방법론보다 실제로 써보는 일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문학원론이나 수필 일반론을 벗어나서 보다 바람직한 문예적 글쓰기 현장의 실습 요령을 항목별로 제시해 본다. 여기서 제시하는 6하 원칙은 흔히 드는 예의 5W1H(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따위와 상이함은 물론이다. 문학예술인 글에서는 적어도 뉴스의 기사 작성이나 법률조건, 또는 역사적 사실 등을 기록하는 격식으로서의 사무적인 육하원칙과는 차원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1) 글에 친하며 성실하게 임한다.
우선 수필에 익숙해지고 좋은 글을 쓰려는 사람은 여러 작품이나 문장에 대하는 태도부터 올바르고 진지한 자세여야 한다. 무엇보다 문학적인 글은 사람의 애정과 재능을 담아서 쓴 만큼 미술, 조각, 무용, 음악보다 더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언어의 예술로서 가치가 있고 유익하며 재미있다는 친근감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시, 소설, 희곡 못지않게 수필 또한 붓 가는 대로 함부로 쓰는 잡문(雜文)이 아닐뿐더러 매력 있는 문학이란 의식을 지녀야 마땅하다. 일찍이 동양인으론 처음 수필(隨筆)이란 명칭을 사용했다는 12세기의 홍매는5) 글짓기에 달통한 수준이었으므로 그의 처지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쓴 글이라는 의미는 결코 함부로 끼적거린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서양에서 맨 처음 에세이라는 용어를 써서 수필을 어엿한 문학의 한 장르로 정립한 16세기의 몽떼뉴 또한 공직에서 은퇴한 중년 이후에 ‘시험 삼아 써본다’는 『수상록』을 써냈으므로 글 쓰는 자세는 진지했던 것이다.
수상록 서두에서 몽테뉴 자신이 밝힌 바는 위의 내용과 함께 주목할 대목이 적지 않다.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성실한 마음으로 쓴 것이다. 이 작품은 초두부터 내 집안일이나 사삿일을 말해 보는 것 밖에 다른 어떤 목적도 있지 않음을 말해둔다.. --(중략)--
내 결점들이 여기 있는 그대로 나온다. 터놓고 보여줄 수 있는 한도에서 천품(天稟) 그대로의 내 형태를 내놓는다.”6)
요컨대, 그는 일체 공리적인 계산 없이 그야말로 순수하게 성실한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사삿일들을 비롯해서 타고난 성품이나 결점들을 숨김없는 그대로 진솔하게 써서 펴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시 수필이 가장 개성 있고 개인적인 기록(personal note) 이라는 속성을 잘 드러낸 것이다. 이런 특성은 후에 그와 대조적으로 추구하여 영국의 F.베이컨이 발표했던 객관적이며 사회적이고 때로는 철학적인 에세이보다 훨씬 대중의 사랑을 받기에 이른다.
몽테뉴에 못지않게 독일 철학자 니체 역시 강조한 바처럼 “글은 영혼과 맥을 이을 만큼 피로써 써라”7)는 정도로 글쓰기에는 성실한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글을 너무 엄숙주의적인 대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항시 오붓하고 친근한 벗으로 여기는 습성이 필요하다. 흔히 보다 생활적이고 고백성의 묘미가 짙다할 정도의 진솔한 이야기로 대화하듯 쓴 수필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수필창작 실기를 논의하기에 앞서 분명히 해둘 바는 무엇보다 글쓰기에 너무 압박감을 느낄 만큼 긴장하거나 경직된 마음을 버리라는 점이다. 지나친 긴장이나 부담감은 오히려 자연스런 호흡을 흐트러뜨린 나머지 원활한 수필을 빚기 어려울뿐더러 글을 두려워하거나 멀리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자신도 노력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마음인 것이다. 수필이란 그저 부담 느끼지 말고 자신이 겪거나 보고 느낀 바들을 진솔하고 자상하게 기록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글과 늘 친근하게 만나고 손수 써보기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P. 하트웰 등도 그의 저서 첫머리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자유 작문>을 권장하고 있음을 본다. “내 글은 형편없을 것이라는 열등의식이나 단번에 잘 써보겠다는 과대의욕을 모두 제거하여 아무런 의식의 부담이 없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훌륭한 작문의 비결인 것이다.”8)
2) 구상을 해서 짜임새 있게 쓴다.
사실 모든 글은 그 나름대로 고도한 예술성을 지닌 유기체이므로 보다 빼어난 글로서 읽히고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집필 전에 어느 정도의 구상(構想)을 해서 접근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이를테면, 수필 한 편을 다룰 경우, 허두에서는 작품 전체의 내용이나 인상적인 면을 한 주제에 집중되도록 명구(名句)나 시구(詩句) 등으로 시작하고 대화체와 일기체를 곁들여 쓰는 방법 등이다. 그 중간에는 적절한 주위의 현실적인 보기를 한두 가지 들고, 외국 경우를 최근 화젯감으로 대조시켜 흥미롭게 끝맺는다는 식으로 엮어보는 것이다. 구상에는 글의 구성을 비롯해서 주제와 글감 및 문체 등도 포함된다. 이렇게 규모 있는 글쓰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문제의식과 함께 단락 짓기와 문단 나누기 등속의 지엽적인 원고작성법 등도 저절로 익히게 되어 있다.
소설의 경우도 이런 구상 문제에 참고가 될 수 있다. 가령, 도스토에프스키는 『죄와 벌』을 3년 동안 거의 완전무결하게 구상한 다음에 집필을 했다. 이에 비해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을 대강만 구상해서 써나가는 도중에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는 것이다. 위 두 가지 방법이 장, 단점은 있겠으나 보다 짜임새 있는 대작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필요한 사항인 셈이다. 그런 만큼 수필 문학도 이제는 선입견처럼 자유롭게 쓰기 방법과는 다르게, 특히 초심자에게는 오히려 반(反)에세이적인 태도로 다루는 일이 바람직하다. 모름지기 수많은 수필 가운데서 한껏 빼어난 구성과 문체 및 주제 등으로 많은 독자를 지니려거든 먼저 알맞은 구상을 해서 써야 경쟁력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대강의 구상을 해놓고 쓰는 데 있어서 유의할 점은 독자들에게 전혀 인위적으로 짜놓고 썼다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글쓰기에서 지나치게 그 구성이나 형식에 얽매이다 보면 수필 본래의 경쾌하고 활달한 맛과 은밀한 개성이 죽어 버리게 마련이기 까닭이다. 그만큼 한 편의 수필을 제대로 빚어내기 위해서는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하는데 이런 노력도 자주해서 글을 쓰다보면 나중에는 차차로 글쓰기에 익숙한 문인이 되는 것이다.
초심자들은 으레 수필 한 편을 쓰려는 경우, 처음에는 한 두 시간 안에 써낼 것처럼 만만하게 여겨질 터이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쓰려다 보면 한 단락도 며칠 동안에 써내지 못한 채로 쩔쩔매는 처지를 당하게 된다. 초기에는 곧잘 버스 안에서 구상을 하거나 식사 중에 문득 좋은 글귀가 떠올라 메모를 한다. 때로는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머리맡의 신문지에라도 적어 놓았다가 글을 완성하는 데 써먹게 된다. 이런 과정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초(草)를 잡고 다듬노라면 점차 솔솔한 글맛도 생기고 익숙해져서 10장 남짓한 원고지 글쯤은 큰 부담 없이 써지게 되는 것이다.
정말 숱한 고뇌와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뒤채는 진통을 겪고서야 자신의 얼과 체취가 배인 글맛을 지닌 한 편의 옥동자 같은 수필을 얻어내기에 이른다. 수필 쓰기는 이처럼 쉬운 듯 더 어렵고 어려운 듯싶은 데서 길을 찾아 자신의 분신(分身)을 만나는 각고와 보람의 작업인 것이다. 여기에 참고로 손쉽게 쓴 듯 잘 읽혀지는 피천득의 「인연」 가운데서 허두 부분과 마무리 대목을 들어보기로 한다.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 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 (중간 부분 생략) ---
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朝子)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근래 있었던 친근한 일로 화두를 꺼내서 춘천까지 강의 나간 사연을 들어 호기심을 끌어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름과 교단이 비슷한 지난날의 일본 성심대학 학생이던 아사꼬와의 아기자기한 만남과 애틋한 헤어짐의 인연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각별한 의도에서인 것이다.
또한 다음 같은 차범석의 진솔한 추억담을 곁들인 글의 중간 보기에서도 미리 구상한 가운데 써진 그 각별한 구성의 배려를 살필 수 있다.
그런데 한 작은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내가 담임했던 승세가 말썽꾸러기였다 .승세는 재주도 있고 눈치가 빠르고 유모어 감각이 풍부한데다가 쇼맨쉽도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날 종례시간에 승세가 나의 지시사항에 대들게 되자 나는 승세의 뺨을 후려치고 출석부로 그 머리를 두어 번 두들겨 팼다. 나도 오기가 있는 터이라 자존심이 몹시 상했었다.
:이 놈아, 늬 엄마가 소설가면 소설가지 네 놈이 소설가냐?“
승세가 집에 가서 이실직고했을 게 뻔했다. 교사가 피교육자에게 체벌(?)을 가했다는 사실도 확대보고 되었으리라. 퇴근시간이 임박했을 때 박화성 선생의 히스테리칼한 항의전화가 귓청을 뒤흔들었다.
“그 애가 어떤 애인데 손찌검 질이요? 앉으면 다칠세라 쓸면 쓰러질세라, 나는 이날 이때까지 자식들에게 손가락 하나 대는 적이 없는데...“
존경하는 작가와의 사이에 일어난 한때의 불편했던 에피소드를 예민한 그대로 써서 긴장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만큼 앞에서 글쓴이와 작가 사이의 남다른 선의의 인연관계를 든 발단에 이은 위기 설정으로서 나중에는 두 분이 화해를 이루고 아들의 담임을 서울로 끌어올려서 더 좋은 은혜를 주고받은 사실의 덕담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말하자면 소박하되 소설이나 희곡 같은 기법의 효과를 기하고 있는 셈이다.
수필에서도 소설이나 희곡(극문학) 경우를 비롯해서 때로는 동화 및 서사시 등, 일부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줄거리가 있는 서사성(敍事性) 작품에서는 대개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을 이룬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처음에는 발단(起)--- 전개(承)---위기, 크라이막스, 반전(轉)--- 마무리(結) 형식을 띠게 마련이다. 그래야 정석적(定石的)으로 잘 어울리고 무리 없이 성공하게 된 편임을 참고할만하다. 앞에서 든 피천득의 「인연」도 한 편의 꽁뜨와 같은 소설적 구성에 가깝고 차범석의 위 회고담 역시 소설이나 희곡적인 서사구조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승전결적 구성은 몽떼뉴류의 일반 수필뿐 아니라 베이컨류의 칼럼 같은 논술적 에세이 등에도 대부분 해당되는 분포를 이루고 있다.
글(수필)의 구상과 짜임새 문제와 상관하여 더 참고해 둘 점은 글의 절차와 글을 읽어줄 독자층에 대한 자상한 배려 문제이다. 요즘의 글은 글을 써서 발표하는 사람 자신보다는 그 글을 실지로 읽어줄 독자(수용자)의 기호나 반응 위주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9)나와 있기 때문이다. 수필에도 물론 나름대로 글쓰기의 단계가 있지만 문학예술이 아닌 학위논문 쓰 듯 그렇게 철저한 절차는 필요치 않다. 예의 논문 테마나 제재 및 구상에 이은 자료의 수집, 평가, 분류 다음으로 목차 설정, 초고작성, 수정 보완 또는 퇴고, 예비 발표 등을 수필에서는 다 거치지는 않는다. 겉보기로는 그저 위의 메카니즘을 간추린 주제, 제재, 구상과 집필 문체, 다듬기 정도로 10장 안팎의 원고분량을 채우면 한 편의 수필이 된다.
그런 대신에 수필에는 몇 가지 세심하게 유념해 둘 사항들이 따름을 터득해서 대처해야 한다. 무슨 내용의 글을 누구에게 읽힐 것이며 언제까지 얼마의 분량을 쓸 것인가? 그리고 어느 매체를 통해서 발표되며 언제쯤 독자들에게 나갈 것인가? 신문이면 조,석간, 라디오라면 아침이나 심야 방송의 분위기나 톤에 신경을 써야 한다. 여성 잡지라면 춘하추동 중에서 어느 계절에 발표될 것인가를 감안하여 제목과 제재 및 문장 호흡도 다듬을 만하다. 거기에다 구체적으로 다룰 대상층이나 실제로 많이 읽어줄 독자층의 성별, 연령별, 직업별, 학력별 수준은 물론이요 시사 문제까지도 감안하는 노력이 있어야 좋은 글로 호응을 얻게 된다.
실제로 여러분이 직접 모교 후배로부터 개교 기념 특집으로 펴낼 교지에다 실을 원고를 청탁 받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마침 개교 50주년이던 지난해에는 후배가 LPG 대회에서 골프 우승을 한데다 사법시험에도 두 사람 합격했던 참인데 -여고에 입학하는 신입생에게 주는 글- 2천 자 분량을 열흘 안으로 보내야 한다면 당장 어떻게 대처해서 써낼 것인가?
3) 자기 렌즈로 초점을 맞춰 접근한다.
수필에서는 사물을 보고 느끼며 생각한 바를 적을 때, 자신의 독특한 시각(視角)과 선명한 견해를 지녀야 한다. 본디 개성적이고 응분의 풍자와 비판정신을 요하는 에세이 문학의 속성에 직결된 사안인 것이다. 사물과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데는 내면적인 거울로까지 남다를 만큼 날카롭게 파고들고 문제점을 꼬집어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시각문제는 지성적인 견해에서는 물론이요 감성적인 관조 경우에도 필요한 수필의 요건인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고 느끼며 이야기 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과 섬세한 감정을 실어서 쓰는 작품은 구절구절 신선한 인상과 감흥으로 여러 사람의 가슴에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이미 반세기 전에 중 고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다음의 글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가제)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깨금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 지 옷자락과 손 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음영과 윤택과 색채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버리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아)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感傷)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땅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가운데
보통 사람들은 낙엽 타는 냄새와 연기를 피하고 하찮게 여기게 마련이지만 글쓴이는 특히 그것을 갓 볶아낸 커피향이나 고소한 깨금 냄새로 느끼는 것이다. 더구나 작가는 마치 죽어 버린 꿈의 시체들을 화장하듯 태워버린 낙엽의 재를 땅에 파묻고는 오히려 맹렬한 삶을 다짐하는 것이다. 흔히 조락의 계절에 낙엽을 태워 묻으면서는 감상에 젖어 의욕을 잃게 마련인 타성에 비하면 범상치 않은 작가의식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도 이 수필은 명작으로서 오래도록 여러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또한 수필에서는 이렇게 자기만의 독특한 렌즈를10) 활용하되 대상이 되는 사물의 수다한 현상 가운데서 문제점이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 천착하는 접근이 바람직하다. 잡다한 사물을 군더더기처럼 나열하지 말고 가장 정체 있는 해당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노력이 긴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주마간산(走馬看山) 형태의 해외여행이나 국내 명승지 탐방 등에서 너무 많은 구경거리와 이야기 대상 가운데서 어수선하게 그 모두를 들지 말고 중요한 한, 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어 밀도감 있게 다루어야 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흔히 기행문에서는 요령 부득과 분수를 넘는 욕심 때문에 실패하게 마련인데 이 역시 독특한 렌즈나 초점 문제에서 빚어지는 일이다.
다음의 글은 여기에서 문제되는 글에서의 초점에 관계된 사안으로서 참고할 대목이다. 수필쓰기에서 흔히 범하기 쉬운 문제점을 다룬 에세이 가운데 한 부분이다.
기행문은 이제 여행 보고서 같은 진부한 수법에서 탈피하여 문예적으로 승화된 기행 수필이 되어야 한다. 기행수필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소재(체험)에 대한 의미화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행수필에서는 과감한 함축과 절제가 요구된다. 여정(旅程)은 있되 과감히 생략해야 하고, 체험은 쓰되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절제해야 한다. 기행문을 쓸 때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은, 일기처럼 한 번에 보고 체험한 것을 죄다 늘어놓고 싶은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또한 현학적인 취미에 사로잡혀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동원하고 싶어 하는 치기(稚氣)를 버리는 일이다. 이태준도 기행문을 쓸 때 고증(考證)을 일삼지 말라 하였다. “기행문에서는 흥취로 교(驕)하되, 지식으로 교할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11)
숱한 여행객들이 보고 느끼는 상식적인 수준과는 색다른 관찰과 밀도감 있는 기행 수필을 위해서도 독특한 시각과 문제의식이 깃든 초점의 통일이 필요한 것이다.
4) 제목과 서두부터 관심을 끌도록 쓴다.
수필도 글 쓰는 사람 혼자만의 넋두리가 아닌 바에야 독자들에게 이목을 끌어 함께 대화하며 즐거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구나 문인은 서점이나 신문지면에 지천해 있는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된다. 이런 접근은 여러 독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친숙하게 다가드는 지름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글쓰기에서 일반화된 예의 낯설게 하기12) 기법으로서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참신성을 덕목으로 하는 것이다.
수필의 발상이나 제목부터 산뜻하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름을 내거는 전략이 바람직하다. 오래도록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하기 쉽고 읽기 좋으며 품위에 알맞은 제목은 글쓰기에나 반향 면에 매우 효율적이다. 이희승의 「딸깍발이」,『벙어리 냉가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서정범의 『놓친 기차는 아름답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영자의 『한 송이 꽃도 당신 뜻으로』, 정목일의 『침향(沈香)』 등의 보기가 그렇다. 수필 뿐 아니라 소설 작품의 제목 효과 역시 참고가 되고 남는다.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 게오르규의 『25시-』나 마레크 후라스코의 「제8요일」등도 마찬가지 예이다. 특히 모파상의 중편 「비게 덩어리」는 별 인기가 없어서 여러 해 만에 재판을 낼 때에 『기름진 女人』이라는 제목으로 고쳐내자마자 베스트셀러의 반향을 일으켰다는 일화는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문학작품 이름의 주요성은 다른 모든 문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장만영의 시 「달, 포도, 잎사귀」같은 실례에서처럼 글을 다 쓰고 난 뒤에 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만큼 시인은 시 한편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몇 달을 두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었다고 스스로 쓴 자작시 해설에서 토로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이름 짓기의 중요성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는 각 기업체 이름이나 여러 단체 또는 각급 학교명의 경우와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수필의 서두 또한 그 제목 못지않게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수필 쓰기의 실기 면을 정리한 작가는 “더욱이 이 서두는 그 수필을 읽는 독자와 처음 만나고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이자 첫 인상이다. 다시 말해 그 수필을 쓴 작가가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것과도 같다.”13)며 주제 설정의 문제에도 낯설게 하기의 참신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참신하고도 뚜렷한 주제, 개성적이며 독창적인 주제, 독자층의 관심과 흥미를 끌고, 호소력이 강하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설정하는 일 등을14) 들고 있는 견해가 그것이다.
수필의 첫머리는 글의 첫인상 이상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시나 단편소설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수필의 허두는 마치 단거리 경주의 스타트처럼 작품 감동과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서두는 독자들에게 작품의 다음 이야기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하는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단초가 된다. 그리고 그 출발은 반드시 글의 끝 부분을 가장 효율적으로 맺어야 할 만큼 마무리와 밀접한 연결선상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서양의 논평적인 에세이 쓰기 법 하나를 참고하면, 서론에서는 독자가 궁금증을 갖도록 결론에 무슨 말을 할지 말하지 말라는15) 것이지만 이 또한 서두와 마무리의 유기성을 강조한 견해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서두가 리듬에 맞고 다음 이야기 전개와 어울려서 경쾌하게 잘 풀려나가면 글쓴이는 대체로 성공한 글을 써내게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로 글발이 부자연스럽고 무리하게 걸리적거릴라 치면 아무리 익숙한 수필가도 곤욕을 치르며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런 만킄 적어도 수필의 서두는 무던한 구성과 더불어 선명한 주제 설정 아래 유의해서 써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미 P. 발레리도 시의 첫 구절은 신이 주는 영감이라고까지 말한 만큼 수필가들 역시 글의 서두에 신경을 쏟는다.
그렇다고 몇 달 며칠을 두고 망설이고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므로 창작에 뜻 둔 초심자들은 서투른 대로 과감하게 서두 쓰기에 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설사 실패한다손 치더라도 어떤 발랄하고 실험적인 자세로써 써나가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그래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고치고 다듬는 과정에서 자신의 특색 있는 문장을 계발하고 알맞은 서두가 생겨나고 작품 윤곽도 차차 눈에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서두나 본문 쓰기에 손댈 경우, 날카로운 감각이나 모험 또는 실험적인 시도 없이 평범한 어휘만 나열하는 일은 거의 백년하청(百年河淸)일 정도로 발전을 기약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문단 지망생 가운데 오랜 기간 진척 없이 지내다가 결국 등단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실로 작품 성패를 좌우할 만치 주요한 문학 작품에서의 서두는 글 품평장에서의 전시 상품들처럼 각양각색이다. 다음 보기에서 보듯 여러 문인들은 각기 독특한 서두로써 독자들의 이목을 끌면서 작품의 구도에 의한 분위기를 살리고 있음을 본다.
먼저 첫 줄부터 파격적인 인상으로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경우이다. 남들은 질겁할 깜장 아저씨와 만나기를 좋아한다는 장편수필의 서두는 매우 인상적이면서 수필가에 대한 호기심과 작품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리고 후자 역시 독자들은 처음부터 내던지는 질문에는 동의하지만 그 다음에 정작 글쓴이가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인가 궁금증이 솟도록 한 것이다.
나는 굴뚝 청소부를 만나기 좋아한다.-----찰스 램, 『굴뚝 청소부』
우리는 어찌해서 이렇게 답답한 골짜기에서 태어났을까요?
참 지긋지긋 하지 않아요? -----유달영,「재발견된 한반도」
다음은 남달리 격정적으로 읽는 호흡으로 가슴 뛰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여 강한 인상과 흡인력을 발휘한다. 또한 후자는 전체 내용에 이어지는 데 적합하면서 산뜻한 맛을 주는 엘리어트의 시편을 인용하며 독자들을 이끌어 가는 경우이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소리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민태원, 「청춘예찬」
사월은 몹쓸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길러내고/------이양하, 「봄을 기다리는 마음」
한편 위와는 다르게 논리상으로 맞지 않는 역설법으로써 지적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를 본다. 글짓기 방법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면서 수필작법을 논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가 있다는 모순을 내거는 모험부터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수필의 작법을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강석호, 「나의 수필작법.」
어리석은 사람은 슬기가 있고, 느린 사람은 아취가 있으며, 우둔한 사람은 잔꾀가 있고 은자는 유익함이 있다-----임어당, 「슬기와 어리석음」
끝으로 수필의 비판적인 속성을 띠는 풍자법으로써 매운 맛을 보이는 경유이다. 평소 「방망이 깎던 노인」 「비원의 가을」에서의 고즈넉하고 서정적인 작풍(作風)과는 판이하게 매서운 글이다.
남원 광한루는 부근에 별달리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윤오영, 「광한루기」
요컨대, 수필의 서두는 되도록 독자의 관심을 끌도록 써나가되 결말부분의 마무리와도 면밀하게 연결시키는 일이 바람직하다. 앞은 거창하게 나가다가 끝은 흐지부지 용두사미식이 되거나 유기적인 연결성이 결여되어서는 안 될 터이다. 설사 요즘 유행하는 바대로 실험적인 탈구조주의나 파격적인 해체주의식의 글쓰기를 시도하여 결말을 일부러 서두와 관계 짓지 않은 작품 역시 서두와 결말의 유기성을 의식해 쓴 연결성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글의 구성이나 긴장감 및 짜임새가 서로 조화를 이룰 만큼 서두와 마무리는 머리와 꼬리처럼 긴밀한 상관성을 지니게 함이 자연스럽다.
앞에서는 주로 서두의 보기를 많이 들었으므로 여기에 현역의 중견과 신진 수필가의 글 가운데 끝맺음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 수필은 인생에 대한 깨달음의 글이다. 내면에 대한 응시이며, 알고 있음에 대한 표현보다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한 발견이다. 도달할 수 없는 깨달음의 길이 아닐까.
--- 정목일 「수필의 눈」에서.
--- 그 옛날, 언젠가 샘가에 풀어 놓았다가 깜빡 잊고 놓아둔 손목시계는 지금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을까. 샘가를 맴도는 내 마음의 시계는 자주 그 시절로 되돌아가곤 한다.
--임은수 「마음의 샘」에서.
5) 호흡에 맞는 문체로 흥미롭게 써나간다.
언어와 문자의 예술인 문학에서 문장이나 문체는 작품의 기본요소이다. 따라서 수필에서는 어떤 문체가 바람직한 것인가 고려, 검토해볼 대상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박물학자 뷰퐁도16) 영예로운 아카데미 회원 수락 연설에서 ‘글은 곧 사람’이라고 설파한 바 있는데 여기서의 글이란 문장 스타일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문체는 글쓴이의 개성과 인품 및 사상이 드러나는 동일항으로서 독자 끌어들이기를 좌우하는 요인이 되므로 수필에서 주요한 대상이다.
이런 문장 스타일(문체)가운데 어떤 것이 수필에 적합한가는 수필가의 개성이나 작품의 대상 및 주제 또는 분위기 조성 등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대개 몽떼뉴류의 감성적 수필에는 감각적인 묘사가 어울리고, 베이컨류의 지성적 에세이에는 사변적인 서술이 제격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여러 경우에 따라서 다양해 질 수 있을 터인데 중요한 문제는 묘사와 서술이 적절한 만큼 최상의 문학적 효율성을 기하느냐는 점에 있다. 여기에는 흔히 글쓴이의 여울진 감정이나 의식의 흐름 내지 사색의 반영이 그들 자신의 리듬과 호흡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글쓴이 자신과 독자층의 기호와 호흡을 감안하여 거기에 걸맞는 글쓰기 노력을 기울임이 바람직하다.
남창으로 향한 서탁(書卓)이 차고 투명하고 푸르다. 하늘을 비침이다. 갈릴리 바다의 빛은 그렇게도 푸를까. 벚나무 가지에 병든 잎새가 늘었고 단물이 고일 대로 고인 능금 송이가 잎 드문 가지에 젖꼭지 같이 쳐졌다. 외포기의 야국(野菊)이 만발하고 그 찬란하던 채송화와 클로우버도 시든 빛을 보여 간다. ---이효석, 「청포도의 사상」에서
한 포기의 수채화처럼 시각적 이미지를 선명하게 살린 데다 미각과 촉각적 이미지를 곁들인 묘사이다. 이 가운데 “차고 투명하고 푸르다. ---그렇게도 푸를까.”하는 대목은 다분히 서정적인 리듬이 담겨 있어 더욱 잘 읽힌다. 여기에 은은하고 매운 들국화의 꽃향기를 넣었더라면 금상첨화일 문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수필에도 서정시에 못지않게 감성적이고 서정 깃든 표현을 써도 좋은 작품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수필에서는 흔히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주로 하는 산문으로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논자들을 자주 만난다. 하기야 입센의 『인형의 집』이후 근대 희곡에서마저 운문보다는 산문정신으로 써야한다니 그럴 만도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이론가의 실제 창작 메카니즘을 외면한 속단적 비평논리이므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방금의 이효석 수필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발표되어 온 우리나라 대다수의 몽떼뉴식 수필들에서 서정성의 글쓰기로 꾸준히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엄밀하게 살필 때, 설사 산문이라고 발표한 글들마저 글자 수의 배열이나 반복 대목 등에 상당량의 시각적인 리듬과 청각적인 호흡이 숨어 있다. 또한 산문문학의 대표 장르라는 소설분야에도 도리어 서정시적 리듬을 활용해서 새로운 효과를 거두는 서정소설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특히 형식의 자유로움을 지니는 수필 장르에서는 오히려 글쓴이의 체질이나 작품 분위기에 따라 때로는 원활한 운문을 곁들여서 더 바람직한 서정수필 효과를 거둘 수도 있는 것이다.17)
그런데 우리가 유의할 바로서는 산문, 운문 다 마찬가지로 특별히 필요하지 않은 경우는 흔히 저지르듯 일상적인 상투어로써 무미건조하고 세련미 없는 글쓰기 버릇은 버려야 마땅하다. 일상의 반복적인 삶에 지쳐있는 독자들에게 투박한 주변 이야기의 나열은 따분함만을 더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삶 속에서 고독하고 피로해 하는 독자들에게는 보다 신나는 이야기나 신선한 소식과 유익한 정보로써 새로운 활력을 주는 글을 선물해야 한다. 그런 글쓰기를 위해서 우리는 가능한 대로 안이한 서술보다는 실감나는 시각?청각?후각 면을 구체화시킨 묘사적 문장구사로써 낯설게 하기를 지향하는 노력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문체(文體, 스타일)는 원천적으로 글쓰기의 호흡과 직결되며 문장 표현상의 내재율(內在律)에 맞춰 각자의 리듬이나 가락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실체이다. 여기에는 문체가 문장의 탄력성과도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장들의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균형과 댓구와 대조가 어우러진 음악을 깨닫게 한다. 또한 우리는 마치 늘어났다 줄어드는 고무벤드처럼 의미를 다듬고 제한하는, 그리고 계속 나아가 다가가는 말을 탄 엘리스처럼 갑작스럽게 멈추는 그러한 문장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 쓰여진 문장의 탄력성은 균형과 대조의 형식성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고 구어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18)
글에 담겨 있는 감정의 흐름인 호흡은 문장의 운율적 가락의 느리고 빠름과 길고 짧은 장단으로서 글 읽는 재미와 흥을 유발한다. 그런 만큼 문체는 수필가가 독자를 끌어들여 감동시키는 흡인력(吸引力)과 작품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하는 요인인 것이다. 본디 문체는 사람의 호흡이나 맥박은 물론이요 밤과 낮, 춘하추동의 자연 순환에 바탕 해 있는 것이므로 수필 쓰기에서 문장 구사와 문체 활용에 각별 유의해야 마땅하다. 자연과 인체에 잘 어울리는 문장의 리듬은 그대로 독자들에게 쾌적한 즐거움을 주면서 잘 읽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편리한 대로 실제 작품의 실마리 부분을 들어보기로 한다.
나에게 있어서 목포는 연인처럼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향수의 항구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목포를 처음 가 본 지가 40년도 넘었기 때문이다. 8?15 광복 다음다음 해니까 1947년의 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목포로 간 것이다. 같은 도내이기는 하지만 담양에서 목포는 상당한 거리여서 산골 소년이 생전 처음 기차를 타고 생전 처음 바다가 있는 항구를 찾아갔던 만큼- - -
- 박연구의 「목포의 눈물」에서
포성이 건널목을 넘어간다. 바람이 철길을 따라 흘러가고 바람 따라 구름이 간다.
평강 평야.
쓰러져 누운 철마의 잔해(殘骸) 사이로 어느새 피었다 지는가, 나래를 접는 노오란 달맞이꽃, 아침 이슬 속에서 외롭고 서럽게 이울고 있었다. 외가의 강기슭의 달맞이꽃처럼.
- 변해명의 「달맞이꽃」에서
전자는 학생시절 이후 40년 만에 항구에 찾아간 나그네의 한결 느긋하면서도 잔잔한 마음을 산문적으로 풀어 가는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런가하면 후자는 30년 전의 소녀 때 전쟁 난리 속에서 지켜보았던 이모의 기구한 삶 모습을 보다 시적으로 역동적인 감정을 담아서 함축적으로 접근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러면서도 이 수필가들은 저마다 걸 맞는 호흡과 문체로써 독자들에게 어필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경우, 어릴 적에 체험했던 가난한 삶의 조각들을 가슴 속에 품은 채 지내오다가 강산이 세 번 남짓 바뀐 세월을 흘려보낸 뒤에서야 카타르시스 하듯 한편의 글로 표출해낸 셈이다.
요컨대, 바람직한 수필의 문체는 평소 스스로 겪고 살아온 인생의 애환을 근원적인 자신의 호흡에 맞추어 간결하게 묘사와 서술을 겸용해서 원활하게 구사해야 잘 읽히는 것이다. 때로는 특수한 경우에는 만연체 문장이 효율적이기도 하지만 대개의 글에는 간결한 표현이 좋다. 여기에는 수필 문장 7원칙으로 든 간결성, 진솔?담백, 해학성, 현장감 및 실감, 논리의 서정화, 개성적인 문장, 작가의 체취와 천착성 등19)이 참고 된다.
이처럼 호흡 맞는 문체로써 글쓰기를 하되 재미가 없어서는 바람직한 수필이 될 수 없으므로 반드시 흥미를 곁들여야 한다. 수필 또한 글 읽는 즐거움과 교훈을20) 주는 문학예술의 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작가 섬머세트 모옴21)도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를 주요시해서 써야 한다고 강변한 바 있듯 어쩌면 근래 들어 심각해진 문학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선 진정으로 재미있는 글이 필요하다 하겠다. 흥미 없는 문학작품은 21세기의 인터넷이나 비디오, 스포츠 틈 속에서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기 십상이므로 우리 모두가 글쓰기에서 각별 유의해서 대응해야 할 과제이다. 서정범 역시 실제의 집필 요건으로 재미를 들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수필을 쓸 때 먼저 생각하는 것은 이 글이 재미있는 글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재미없는 글이라면 누가 시간을 허비하여 가며 읽겠는가.”22)
그렇지만 수필의 재미란 결코 읽기 좋고 흥미로운 문체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시화(詩話)나 만록(漫錄) 같은 우리 옛 수필들에서 보듯 고전문학의 매력으로 꼽히는 예의 익살 넘치는 해학(유머)과 재치(위트) 등이 한껏 글맛을 돋운다. 어쩌면 글에서 문체가 김치라면 유머와 위트 혹은 풍자(세타이어)는 김치의 양념 구실을 하는 깨소금이나 겨자 또는 고춧가루처럼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문체가 다분히 체질적인데 비해서 상대적으로 유머와 위트 등은 보다 지성적인 속성을 띄고 있다. 흔히 서양에서는 여유 있는 유머와 위트가 있어야 문화인 대접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는 우리 문인들도 일상생활 못지않게 되도록 글에서 유머와 위트를 자주 활용해야 많은 독자층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청탁받은 글의 마감 시간에 쫓기는 원고쓰기의 긴장을 오히려 콧털 깎기 딴청으로 모면하려는 이양하의 「글」에서 우리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또한 워낙 작은 체격 때문에 양복지도 가게 주인에게 절반밖에 들지 않게 하며 남에게 폐 끼치지 않아도 고마운 도움은 별로 받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이희승의 「오척단구」에서도 우리는 유쾌한 웃음을 선물 받는다. 이밖에 술 한 모금 못 마시는 처지에 주당들과 어울려서 술집들에 드나드는 피천득의 「술」이나 재치 가득한 조경희 수필가의 글들에서 우리는 곧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6) 항시 삼다(三多)의 생활을 즐긴다.
끝으로 바람직한 수필을 쓰는데 유념할 바로서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은 널리 알려진 바 대로 일찍이 11세기 초엽에 중국의 선비 구양수(歐陽修)23)가 말한 삼다(三多)를 생활화하는 일이다. 문장으로서 당송팔대가 반열에 든 그가 문학도들에게 강조한 것은 평소에 여러 명작들을 많이 읽고(多讀), 많이 습작해 보며(多作), 자신과 남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많이 헤아려보는(多商量) 노력이 필요하다는 견해이다. 이런 글쓰기의 삼대 조건은 그 중요성을 아우른 것으로서 요즘의 우리 사회에 더욱 절실히 적용되는 사안들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은 우선 평소에 기초소양을 쌓기 위해서라도 동서양에 걸친 고전들을 비롯해서 최근의 화제작에 이르도록 많은 작품들을 두루 섭렵해서 다독(多讀)을 즐기는 책읽기 습성을 지녀야 한다. 동서고금의 선현들과 대화하는 독서야말로 자기 내면적인 사고의 폭을 넓히고 열린 시야를 찾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대학 입시 등으로 인해서 교과서에 매달려 지내게 마련인 요즘의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특히 두보(杜甫)가 말했던 바 “ 신사는 마땅히 수레 다섯 대 분량의 책을 읽어야 한다.(男兒須讀五車書)”라는 의미도 깊이 새겨 둘만 하다. M. 아널드24)의 말처럼 교양의 수단인 독서와 관찰과 사색 가운데서 상상력을 통한 문학적 독서가 가장 적합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독서조건은 문인 지망생이야말로 마땅히 등단 이전에 인문적(人文的) 소양과 사회적 학식 등을 두루 갖추어서 튼튼한 기초를 다져야 하는 필수과정임을 전제한 것이다.
더욱이 문단에서 활동하려는 문인 지망생은 여러모로 기초소양을 쌓은 다음에 이론보다 실제적인 습작(習作)을 여러 번 거듭하여 다작(多作)행위로 실기를 익히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일정 단계를 거쳤다면 직접 작품을 구상하고 글로써 표현해서 형상화하는 습작을 많이 해 보아야 한다. 서투르나마 자기 나름대로 작품의 골격을 만들어 놓고, 이를 지우고 고치거나 다듬고, 또 다시 쓰고 하는 수련 과정을 지칭한다. 이 단계서는 몇 차례쯤 신문 잡지에 응모하거나 투고해서 낙방하는 시련도 거치게 된다.
문제는 이 값진 시험기를 분발하는 자세와 인내, 그리고 새로운 노력으로 이겨내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역량 부족을 보완하는 방법으로서 긴장 해소와 문장력 신장에 적합한 필사(筆寫) 훈련이 있다. 기존의 당선작이나 명작 서너 편을 엄선하여 너덧 번씩, 또는 여남은 번씩 시험지에다 펜으로 손수 베껴 쓰는 일을 몇 달쯤 거듭 실행하는 것이다. 끈질긴 노력과 지구력 및 집중력을 겸한 이 숙련법에서는 실로 여느 문사를 사사(私事)해서 배우는 이상의 실력을 터득하게 마련이다. 비록 혼자서라도 이런 문장의 기초 수련을제대로 마치면 저절로 문리(文理)가 트이며 점차적으로 필력도 거듭나고 해서 신경숙(申京淑)1)주25)이나 이순원 (李舜源)작가의 보기에서처럼 자신의 가능성 많은 문학적 광맥과 빛나는 글체(문체)를 찾게 되는 것이다.
문학자들은 으레 습작기에 여러 번 응모하여 낙선되는데 그 쓴잔을 많이 마시고 나서 당선된 문단지망생이 실로 튼튼한 저력을 발휘하여 문인으로 대성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러 차례 입선의 고비에서 당락이 갈리는 경우는 물론이요 글이 신통치 않다는 처지에서는 그 원인을 알아내고 새롭게 대응하는 전략이 긴요하다. 이런 때 필요한 열쇠가 다름 아닌 다상량(多商量)의 지혜인 것이다. 자신의 글에서 장단점이 무엇이며 필요하다면 경쟁 상대였던 당선작의 특장점은 어디에 있는가? 독자들과 심사위원, 평론가들은 응모작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점을 스스로 궁리해 봄은 물론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서 합평(合評)자리, 또는 때때로 가까운 문우들에게 의견을 귀담아 들어서 그 보완책을 진중하게 모색, 실행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여기에는 되도록 뜻을 같이한 문단지망생들이 만든 글쓰기 그룹에 참여하거나 인터넷에 개설된 에세이 카페 등에 자주 습작품을 올려 회원들의 견해를 참고함이 더 좋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글쓰기 노력 가운데는 기본적인 구성의 틀이나 원고지 다루기며 세세한 문장구사에 걸쳐 여러 번씩 고치고 써넣고 빼내고 또 고치고 다듬어 손질하는 첨삭의 퇴고과정(推敲過程)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3. 맺음말
위에서 필자는 문학 지망생과 교양인을 대상으로 삼아 가까운 문우(文友)와 대화하듯 문예적인 수필 중심의 글쓰기 요령 6하 원칙을 알기 쉽게 정리해 보았다. 30여 년 동안 강단과 문단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평론활동을 해오면서 생각해온 바를 바탕으로 체계화한 셈이다. 전공이론에다 가끔씩 맡아온 수필문학 강좌와 두 권의 수필집(『꿈과 낭만 그리고 지성』1986, 『글 쓰는 생활의 보람』 2004)을 펴낸 글쓰기 체험을 거울삼아 집필해 본 것이다. 해서 오래도록 미뤄오던 숙제를 끝낸 셈인데도 오히려 일상의 생활을 말하듯 상식적인 항목만 나열했다싶어 무안한 감이 앞선다.
하지만 나름대로 글쓰기의 중요성과 그 기초이론의 틀을 세우고 실질적인 요령도 거의 논의하였다고 생각된다. 아무쪼록 이런 창작 실기론을 참고삼아 교양인을 포함한 문단 지망생 여러분 각자가 실천적인 글쓰기에 힘써서 값진 꿈을 이루어가길 바란다. 그것은 결코 서양의 명문 대학생들도 글 잘 쓰는 것(굿 라이팅)이 제일 소망으로 여긴다는 사실에서만은 아니다. 진실로 좋은 글쓰기란 어쩌면 황량한 현실 사회의 벌판에다 마음의 푸른 초목들을 가꾸면서 꿈을 꽃피우고 보람의 열매를 키워가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제시한 글쓰기의 6하 원칙(六何原則)은 비단 수필장르뿐 만 아니라 시나 소설, 희곡, 비평 등의 나머지 문학 분야 전반에도 좋은 참고가 되리라고 믿는다. 이제 우리는 문예지나 여러 수필집 등에 실린 남의 글 읽기에서 얻는 즐거움 외에도 곧잘 신문, 잡지와 동인지 등에 손수 자신의 글을 발표하여 여러 독자층과 대화하며 남들도 기쁘게 하는 보람을 누릴 수 있다. 필자는 우리 모두가 평소에 엽서 한 장이나 인터넷을 통한 이메일 등에서도 보다 운치 깃든 그림수필 등으로 한층 더 그윽하고 향기 나는 문화인의 삶을 누리길 기대한다.
後 註 (중간의 각주로 활용해도 좋음)
각주 다는 법에 서툴러서 그러니 본문이나 기존의 각주에다 맨 끝부분의 맺음말 앞쯤에 새 각주 1 개를 추가해서 25)로 모두 25개의 後註가 되도록 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고마워요.
편집과 교정문의는 011-334-5087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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