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날 용서해 줘요
올해가 6.25 한국전쟁이 일어 난지 60돌을 맞이한 해이다. 통계에 의하면 3년 1개월 동안 전쟁으로 인하여 일천만 명의 남북의 이산가족이 발생 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서로 오매불망 가족을 그리며 살아온 세월이 벌써 60년이 되었다. 북에 두고 온 부모, 형제, 자매, 아내와 자식들 누구하나 소홀히 할 수없는 사랑하는 핏줄이다.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아픔은 비록 이산가족이 아니더라도 다 같이 겪어온 아픔이다.
최화영 어르신은 1950년 12월 전쟁이 치열 했던 시기에 황해도 연백에서아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매제와 함께 부모, 형제, 자매, 처자를 북에 두고 월남하였다. 당시에는 당분간 피해 있다가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을 했었던 것이 60년이 넘어 8순의 나이가 다 되도록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남한에서 다시 지금의 부인을 만나 자손을 두고 새 가족을 꾸며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두고 온 가족들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그의 자서전을 쓰고 글 내용 속에 두고 온가족은 물론이지만 특히 아내와 두 살 짜리 자식에 대한 보고픈 간절한 마음을 실어 표지에 ‘여보 날 용서해줘요’ 라고 제목을 썼다. 이 책을 본인에게 입수하여 읽어보고 눈물겨운 이산의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되여 어르신을 만나 보게 되었다.
-안녕 하세요. 최화용 어르신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월남하시기전에는 어디에서 사셨습니까?
“네 반갑습니다. 제가 살던 고향은 황해도 연백 드넓은 들판이었습니다. 6.25전에는 남한 땅이며 첫차타고 서울에 가서 하루 일 보고 저녁차로 집에 와도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결혼은 언제 하셨으며 슬하에 자손은 몇이나 두셨습니까?
“6.25전쟁이 나기 3년 전에 연백 처녀와 결혼을 하였으며 아들 하나 있었습니다. 아들이 2살 때 한참 엄마 아빠 정도 말을 배울 때 헤어 졌지요. 지금도 눈에 밟 힙니다. 살아 있으면 56살 되었을 겁니다.”
-핀난 하실 때 어디로 남하 해오셨습니까?
“50년 12월 18일 예성강 다리가 끊어져 육로로는
못 오고 작은 매제와 백석포에서 배를 타고 남하
하였습니다.“
-떠나오실 때 가족은 몇 명이나 두고 오셨나요.
“부모 두 분과 처자 둘, 동생 넷, 모두 여덟 명이 었습니다.”
-그 당시 직업에 종사 하셨습니까?
“청과물, 수산물 도매시장 기업체에서 서사로 근무
를 하였습니다.”
-군대는 언제 입대하셨으며 군 생활은 어떠하셨나요.
“1951년2월에 입대하여 0250393의 군번을 받고 4년 1개월 만에 1955년 3 월에 제대하였습니다. 병기 병과를 받고 부산, 서울, 포천 등지에서 차량 수리 병기 수리 등을 하였습니다. 시설이 열악하여 야전에서 생활이 고 생 스러웠지만 일선에서 전투에 임하신 분보다는 열배 낳았다고 생각됩니다.”
-재혼은 언제 하셨으며 슬하에 자손은 몇 남매 두셨습니까?
“제대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결혼을 하고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습니다.
지금은 가족이 늘어 사위와 손자, 손녀합해 모두 11명이나 되었습니다.
큰 딸이 모시던 내 누이동생이 서울에 살았는데 지금은 나보다 일찍 고인이 되었습니다.”
_ 제대 후에는 어떤 직업에 종사 하셨나요.
“생활용품 파는 어리장사, 노점상, 문방구등 안해본 장사가 없었습니다.”
_ 훈장도 받으셨다는데요.
“ 군에 있을 때 근무성적이 양호 하다고 화랑 무공 훈장을 받았고,2001년10월
광명시 철산동 현충공원 내에 호국 무공 수훈자 공적비에도 이름이 올랐습니 다.”
- 이산가족 상봉에 신청은 해 보셨는지요.
“어떻게든 내 생전에 고향 가족들의 생사여부나 알았으면 하고 미국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서 편지를 보내도 응답이 없고, 적십자가 주관하는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는데 영차례가 안 오더군요.”
-북에 계신 부모님은 지금 고인이 되었겠고 부인께서는 살아 계실 거라고 생각 하 시고 이 글을 통해 마음을 전해 보세요.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다면 당신을 만나 두 손을 마주 잡고 지난날의 잘 못도 빌고 그간의 고생한 일을 위로 해 주고 싶소. 이제 나의 삶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저승에서 당신을 만나 어떻게 대할까 걱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고 있던 모 든 고통과 원망 다 털어 버리고 주님 곁에서 편히 쉬십시오.”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이로서 인터뷰를 전부 끝마쳤다. 최화영 어르신은 적과 총을 겨루는 역할은 아니었지만 전장에서 장병들의 병기를 항상 수리하고 교체하여 교전에 만전을 기하는 역할을 충실히 했던 것이다.
6.25전쟁 참전 유공자 최득수(83세)씨는 적 기관총 진지를 부수고 고지를 탈환한 공로로 태국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달고 다니지 않는다. 한 행사장 근처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저런 훈장을 받았겠느냐”
라고 수군거림을 들었기 때문이다.(6월 22일자 조선일보 사설)
이 젊은이들의 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철부지 같은 말이다. 6.25참전 용사들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날 경제성장을 이루고 잘 살고 있다는 의식을 젊은이들에게 일깨워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참전용사들의 대우를 더욱 좋게 해야 될 것이다.
송파노인종합복지관기자 김광열 ki2104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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